지난 겨울에 잠시 한국에 방문했을 때에, 어머님의 권유로 필자는 동네 유명하다고 하는 치과에 들렀다. 과연, 유명한 치과 답게, 기다리는 사람이 무척 많았다. 접수를 하려고 사람들 사이를 뚫고 카운터에 갔는데, 카운터에 붙어 있는 한 장의, 다소 너덜너덜한, 흰색 A4종이에 프린트 되어 있는 글을 읽어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에이즈나 B형 간염이 있으신 분은 미리 말씀해 주십시오.

이를 읽어 보고 머리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다음과 같았다.
1. 이 치과는 주사바늘이나 드릴 비트를 소독하지 않은 채, 환자들에게 공유하여 사용한다.
2. 환자가 나서서 자발적으로 에이즈나 간염을 이야기 하지 않으면, 그 주사바늘을 그대로 쓸 것이다.
3. 주변에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즉, 프라이버시가 보장되 있지 않은 공간에서, 에이즈나 간염 보균자는 자신의 병력을 카운터에서 쉽게 말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4. 고로, 나는 여기서 치료를 받으면 에이즈나 B형 간염에 노출되어 있겠구나.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 본 결과, 또 주위를 둘러 보았더니 아줌마들과 아이들 뿐이기도 해서, 이런 환자 집단으로부터의 감염 확률은 작을 수 있다고 판단, 의사에게 내 이빨을 맡기기로 결정하였다. 진료실에 들어갔는데, 역시 바쁜 치과 답게, 진료의자가 십여개 놓여 있었다. 한 환자가 마취하는 동안 다른 환자를 치료하기 위함이다. 의사의 이동 시간을 최소한으로 하기 위하여 의자와 의자 사이의 간격은 사람 하나가 겨우 들어설 정도로, 이발소 의자 간격보다 좁아, 옆 환자에게 이야기 하는 내용이 내 귀에 다 들렸다. 아니나다를까, 마취를 위한 주사바늘은 일회용이 아니었다.

이 짧은 시간 동안에, 나는 주변 사람들을 살피고, 그들이 에이즈에 감염되지는 않았는지 피부를 살피고, 또한 주사바늘이 소독되는지 간호사를 살피는 등, 주위 사람에 대한 불신을 가지게 되었으며, 내 몸과 치아가 사람의 부분 아니라 하나의 치료를 요하는 손님에 불과하다는 인권 유린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병원 환경에서는 인권이 여러가지로 무시되는데, 이는 에이즈 감염인이든 그렇지 않든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겠다. 감염인이 아니더라고 개인의 병력이나 치아 상태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옆 환자에게 들려주는 행위는 이미 인권 유린이다. 에이즈 감염인들이 조금 더 소리를 높이는 이유는, 같은 상황에서 자신의 병력을 불특정다수에게 노출해야 하기 때문. 바로 옆에 아줌마들과 애들이 앉아 있는데, 의사와 간호사들이 자신의 에이즈감염 사실을 모두가 듣는 자리에서 말하기 때문이다.

인권단체가 에이즈와 관련된 일을 하려면 다음과 같은 일을 기획해 보기를 바란다.
1. 모든 병원에서는 환자들의 병력을 조사하도록.
2. 그 병력 조사의 내용이나 방법이 비밀을 보장하도록: 초진 상담실, 병원의 비밀보장 각서 등등
3. 한 환자에게 사용되었던 기구의 소독 없는 재사용 금지
4. 환자별 치료 침대의 충분한 격리로 사생활 보장


Posted by AnalogDesigner